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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칼럼] 아직도 한미FTA와 FTA의 차이를 모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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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노조 조회2,681회 작성일 21-06-1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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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는 FTA와 달리 미국과의 FTA다. 그것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게 시장화를 추구하는 나라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나라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나라에게 강요하는 나라다.
  
  미국과의 FTA는 미국식 시스템을 다른 나라에 관철시키는 통로다. 미국에서 공들여 교육한 후진국의 엘리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시장주의와 미국과의 FTA 필요성을 선동한다. 미국이 강요하지 않아도 작은 나라가 먼저 미국에게 FTA를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세심한 이데올로기 전략의 개가다.
  
  원래 FTA는 보호무역 장치다. 다자적 자유무역틀을 짜려던 미국이 각 지역의 반발로 뜻을 이루기 힘들자 만만한 나라들을 1대1로 해치우기 위해 FTA를 동원하는 것이다. 후발주자들끼리 FTA를 할 때는 상품교역이 중심이 된다.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FTA에 대한 막연한 상식은 후발주자들끼리의 FTA에 해당된다.
  
  산업화 선발주자들, 즉 선진국들의 FTA로 가면 서비스부문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미국과 미국 아닌 나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유럽식은 포지티브 방식이다. 포지티브 방식은 개방, 시장화할 부문만 열거하는 것을 말한다. 개방, 시장화가 되지 않는 상태를 전제로 해서 열 부문만 하나하나 찍는 것이다. 미국식은 이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시장화 정책이다.
  
  미국은 네거티브 방식을 고집한다. 네거티브 방식이란 원칙적으로 완전히 개방, 시장화하는 것을 전제로 시장화하지 않거나, 잠시 유예할 부문만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을 말한다. 열거되지 않은 것은 전면 시장화다. 난 이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시장화를 전제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장실패 보정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전면 시장화라니.
  
  한미FTA를 추진하는 우리 정부가 무서운 것은 때때로 보이는 그들의 거의 원리주의 수준의 시장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김종훈 수석대표의 한국영화 경쟁력 향상 방안(우리도 미국인이 볼 만한 영화 만들면 된다)도 그런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차 협상이 끝나고 나서 양재동 농수산물유통센터에서 있었던 한미FTA 토론회에서 정부의 한 연구원은 마지막 발언에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번 한미FTA협상이 네거티브 방식을 원칙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의 발언을 했다. 너무나 엄청난 말이라 난 순간 긴장했는데 정부 측 연구원은 태연작약했다. 토론회 마지막 발언이어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범국민운동본부쪽에서 한미FTA 1차 협상에서 서비스부문은 네거티브 방식으로 합의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네거티브 방식으로 가면 향후 해당 국민국가의 국민들이 어떤 사회적 합의를 하든, 어떤 법안들을 만들든, 어떤 정당에게 투표를 하든 그 나라 시스템은 시장화 한 방향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미국만 고집하는 이런 강도 높은 시장화 협정을 정부는 마치 전 세계가 추구하는 대세인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차 협상이 시작되기 전 우리 정부가 국회 보고자료로 내놓은 한미 FTA 우리 측 초안 주요 내용이라는 문건의 챕터8 투자 항목을 보면, 협상 목표로 투자 자유화와 투자보호 강화가 잡혀있고, 초안 개요 말미에 “투자자와 투자유치국 정부 사이에 투자관련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내 사법절차 또는 국제중재를 이용한 적법 분쟁해결절차 보장”이라는 문구가 있다.
  
  일개 투자자가 한 국가를 상대로 제3의 지역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자와 국가를 동급으로 인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시장화 정책이다. 우리 정부는 협상도 하기 전에 이미 우리 측 초안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마치 이것이, 즉 한미FTA가 세계적인 대세인 것처럼 홍보를 했다.
  
  그러나 세계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이것도 역시 미국식 FTA의 특징에 불과하다. 국민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우리 사회를 미국식 시장사회로 재편하려는 정부의 행태를 이해해줄 길이 없다.
  
  또, 일단 개방, 시장화한 부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역진방지(톱니바퀴) 조항 역시 미국식 FTA의 특징이라고 한다. 결국 일부 예외, 유예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완전 시장화를 목표로 하는 조약이며, 그 경우 투자자가 국가와 동급의 권능을 갖게 되고, 지금은 물론 다음 정권, 다다음 정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조약을 임기가 다된 정권이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투자자가 국가를 제소할 수 있는 조항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 이 부분을 문제 삼자 미국 기업뿐만이 아니라 우리 기업도 미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며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과연 우리 기업이 미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을지, 제소하고 이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문제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투자자 따위가 국가와 동급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국가 뒤엔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민주적으로 합의하고 정치적으로 조정해서 국가의 정책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투자자가 제3의 장소에서 특정 국가를 제소한다는 것은 특정 투자자가 수천, 수억의 사람 전체와 동급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정책 결정권이 해당 국가 국민의 손을 떠나 제3의 장소에 있는 익명의 재판관 손으로 옮겨간다는 걸 뜻한다. 근본적으로 반역적인 발상이다.
  
  물론 정부는 실제로 이런 사례가 많지 않을 거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항을 넣은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다. 그리고 투자자의 국가제소사건이 단 한 건만 있어도 세력지형에서 국가가 밀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국가가 알아서 기게 된다. 아예 제소 사건이 없어도 협박만으로도 투자자는 국가를 위협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가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미국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와 FTA를 해도 스크린쿼터는 문제될 수 없는 부문이다.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문화가 상품교역의 범주만은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도 스크린쿼터를 무역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올 수 없다. 오직 미국과 한국만이 스크린쿼터조차도 무역 협상의 범주로 간주한다.(물론 대놓고 협상은 못하니까 물밑에서 해치웠다.) 그것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을 상품화하려는 미국식 막가파 FTA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미FTA를 옹호하면서 개방은 세계적 대세라는 둥, FTA는 대세라는 둥, 무역하지 않고 어떻게 사냐는 둥 정부의 선동구호를 반복하는 국민들과 언론이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개방된 나라고, FTA도 차근차근 하면 되는 것이며, 무역은 기왕에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한미FTA의 문제는 왜 이 나라를 돌이킬 수 없이 시장화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먼저 달려들어서 애걸복걸하게 만들 수도 있는 FTA를 왜 우리가 먼저 속옷 바람으로 달려들어 자식들 밑천까지 다 빼주냐는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지금은 90년대 이후 시작된 시장화 개혁을 총결산하고 국가의 좌표를 재설정해야 할 때다. 그런데 한미FTA는 미국식 시장사회로 좌표를 고정시키자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강압이 아닌 우리 정부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다. 임기도 다 된 정부가! 무조건 지금의 협상 스케줄은 정지시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