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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명숙의 인권산책 : 위문편지가 아니라 위계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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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691회 작성일 22-01-1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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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여학교에서 군대에 보낸 위문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학생이 억지로 쓴 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편지를 한 네티즌이 인터넷카페에 공개한 게 발단이 됐다. 공개 후 군인을 조롱했다며 여학생을 비난하거나 신상을 공개하는 등의 괴롭힘이 이어졌다. 그러자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시대착오적인 위문편지를 중단해달라는 청원이 등장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애초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제로 학교 수업과 동떨어진 위문편지 쓰기를 강요한 것이 문제다. 위문의 뜻은 위로와 안부를 묻는다는 것인데, 모르는 사람에게 위문편지를 쓰라고 학교에서 지시하니 학생들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 시대에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사용해 안부를 묻는데 편지쓰기라니 어이가 없다. 군인들도 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며 외부와 소통이 자유로운데 편지가 웬 말인가. 필자의 지인도 아들이 군대 가서 매일 전화가 오니 군대에 보낸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편지쓰기를 강제한 것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일본식민지 시기 만들어진 군사문화가 잔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여학교임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군인)을 위로하는 존재로 여기는 성차별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학생에게 감정노동(위로)을 강요하는 일을 성평등을 교육해야 할 학교에서 진행했다는 것은 학교차원을 넘어 교육당국의 관리감독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는 학생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해당 군대에만 사과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위문편지의 유래는 1930년대 일본군(당시 일본 천황의 군대라는 뜻으로 황군이라고 칭함)에게 학생들에게 '황군 위문 작문'을 모집해 매일신보에 발표한 것이 해방된 후에도 이어진 것이다. 군인을 위로할 뿐 아니라 전쟁을 위한 미래 용사로서의 소년을 키우는 교육의 의미였다고 한다. 모든 국민의 전시체제 동원이라는 군국주의체제에서 학교도 그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후에도 학교에서는 이러한 군국주의 문화가 이어졌다. 군사독재 시절을 거쳤으니 군사문화는 쭉 이어졌다. 군의 사기를 강요된 편지로 유지하려 한 것이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 해마다 겨울이면 수업시간에 위문편지 쓰는 시간이 있었다. 내 기억에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니 참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의례적인 날씨 얘기를 쓰고 추운데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 정도를 쓰곤 했다.

 

위문이 아니라 위계편지


생각해보면 교육과 상관없는 일을 시키는 것은 학생에게 강요하는 것은 갑질이 아닌가. 학교장의 위계, 선생님과 학생 간의 위계를 이용한 갑질이다. 만약 회사에서 위문편지나 위문공연을 강요한다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을 것이다. 위문편지는 교육과 상관없는, 아니 성 평등 교육에 저해되는 활동이므로 적정 업무를 벗어난 업무 외 일이다.

 

실제 서울대에서 일하던 청소노동자의 사망 이후 서울대학교의 갑질이 드러났다. 서울대 안전관리킴이 청소노동자들에게 청소업무와 상관없는 영어시험 등을 보며 괴롭히거나 회의 시 양복을 입고 나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어시험 0점이라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갑질이 드러난 것도 청소노동자의 죽음 이후이기도 하지만 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했다.

 

반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갑질에 대해 알리기 어렵다. 먼저 학생들의 발언권이 여전히 적기 때문이다. 학생회가 없는 경우도 많고, 있더라도 발언권이 없다. 학생을 학교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장이나 교사만을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학생은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아예 상정하지도 않는다. 학교는 위계적인 공간이며 학교장의 재량이 너무 크다. 둘째 사회 전체에 퍼진 청소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인식 때문이다. 청소년도 인권을 가진 사회구성원으로 보지 않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반교육적인 내용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가능하다. 강요된 위문편지가 부적절하다고 1965년에 군인 윤창구 씨가 제안한 이후 대부분의 학교에서 위문편지 쓰기를 중단했다. 다만 해당 학교처럼 군대와 결연을 맺으며 이어갔다. 심지어 학교는 해명하면서 1961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전통이라고 표현했다. 학생들에게 위문편지를 강요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전통이라고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일선 학교의 책임자가 문제의식이 없는 만큼 교육 당국의 전수조사와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이제 교육 당국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구성원들도 학교의 민주화에 대해서 사유하고 학생들이 겪는 갑질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