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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와 이별을 고해야 하는가? 이제 혁명은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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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215회 작성일 26-07-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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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백철현 편집위원




세상은 변화했는가? 변화한다. 변화한다면 이제 세상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됐는가? 1980년에 나온프롤레타리아여 안녕(2011년 한국 출판)이라는 책은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다는 말인지 보자.

 

한 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 사상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만큼 시효가 지난 것이 되었는데, 이는 생산 노동자집단 대신 비노동자들의 비계급이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앙드레 고드,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사회주의를 넘어서)

앙드레 고드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안녕을 고하고 '프롤레테르'라는 신인류의 등장을 예고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비프롤레타아트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폭 확장을 의미함으로써 맑스의 주장을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들 불안정 노동자층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은 것도 아니라 바로 무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규모가 커질수록 노동자들은 상대적, 절대적으로 고용 규모가 적어지고 있다. 이게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이고 자본이 성장할수록 실업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이유다.

위에서 "비계급"(실제로는 철저하게 계급)이 늘어나는 이유로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를 근거로 들었는데, 오늘날 인공지능(AI)로 시대의 전면적인 자동화ㆍ무인화는 이들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을 영속적으로 찍어 놓는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이윤추구가 생산의 목표인 사회로 기계, 토지, 공장, 기업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생산만 아니라 분배와 교환, 소비 등 자본주의 사회 전반을 포함하고 있다.

생산노동에서 탈락하여 생산현장에서 떠나거나 불안정하게 취업했다는 이유로 이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무관하다는 앙드레 고드의 주장과 달리 불안정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산물이다. 앙드레 고드는 실업자들이 자본주의 생산에서 멀어져 이들을 노동자들이 아닌 비노동이고 비계급이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로 변모한 것으로 주장하는데, 기계파괴 운동(러다이트)에서 보듯 사실 자본주의 초기부터 실업자들과 불안정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서비스 산업 같은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증대도 자본주의의 비계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공장노동자계급, 산업노동자계급만의 사상이 아니다. 맑스는 물질 생산을 하는 생산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생산을 돕고 생산물의 판매와 교환을 용이하게 하는 판매노동자들, 서비스 산업 노동자들을 포괄적으로 다뤘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만이 아니라 자본에 고용되어 이윤을 낳는 모든 노동을 생산적 노동이라고 하였다.

발전한 자본주의에서의 제조업 쇠퇴와 서비스업 전환으로 자본주의가 근본변화한 것으로 보는 것은 왜곡, 과장이다. 카지노 자본주의가 발전한 자본주의의 기생적이고 약탈적인 모습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제조업은 이 자본주의의 주된 산업이고 일부 제조산업의 이전과 금융화는 제국주의가 이른바 제3세계로 생산을 이전하면서 나타나는 제국주의 착취와 수탈의 모습이다.

오늘날 노동의 유연화, 저임금 불안정노동자층의 양산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실업의 여러 양상을 열거하면서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제3의 범주인 정체적 과잉인구는 그 취업이 매우 불규칙한 현역 노동자집단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정체적 과잉인구는 자본에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무진장한 저수지를 제공한다. 그들의 생활형편은 노동자계급의 정상적인 평균수준 이하로 떨어지며,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특수부분들을 위한 광범한 토대로 된다. 그들의 특징은 최대한도의 노동시간과 최소한도의 임금이다.(맑스, 자본론1권 하, 김수행역, 비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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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들이 자본의 "축적 규모 및 활력의 증대"로 늘어나며 결국 노동자계급 중 "상대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생산 노동자집단 대신 비노동자들의 비계급"도 아니고 바로 생산 노동자들이자 계급의 일부이다. 그것도 점차로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계급이다.

과거 노동자들이 전반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무권리 상태의 노동이었다면, 노동자들이 완강하게 투쟁함에 따라 자본은 "노동 유연화" 전략을 통해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누어 노동자들 태반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층으로 만들었다. 완전 실업자들의 존재는 해고 위협을 통해 불안정 노동자층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의 증대는 노동자들 전반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게 하였다.

이로써 현대자본주의는 "저임금 자본주의"가 되었다. 이 저임금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항구적인 불안정한 취업과 복지와 노동조건의 악화, 무권리 상태로 내몰았다.

자본주의는 계급이라는 말을 불온한 말로 간주하고 대신 계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계급이 없으니 노동자와 자본가 간 적대와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대신에 중산층 사회 운운하여 중산층의 두터운 항아리형 구조를 구축하여 사회 갈등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계급 대신 계층론을 운운하지만 현실은 점점 더 양극화된 계급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8020도 모자라 9010, 991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의 대표 구호가 '우리는 99%(We are the 99%)'였음을 상기해보라.

소수의 (국내외)거대 자본에게 부와 토지, 기업, 공장, 금융기관이 집중되는 반면 절대 다수의 노동자 민중은 빈곤해지고 평생 막대한 채무 노예로 허덕이면서 불안정해지고 있다. 주택문제와 부채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도시는 점점 더 과밀해지고 환경은 악화되고 주택가를 천정부지로 올리는 반면에 농촌은 점점 더 소멸되고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한 쪽 끝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맞은 편 끝{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의 측}에서의 빈궁ㆍ노동의 고통ㆍ노예상태ㆍ무지ㆍ야만화ㆍ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라고 했다.

한 쪽 끝, 극소수 자본의 부의 축적과 거대자본화가 다른 한 쪽 끝에서 절대 다수 노동자 민중의 빈곤과 실업, 장시간 노동과 무권리의 노예상태 등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특수고용노동과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자영업자의 증가가 아니라 맑스가 소생산자의 전반적인 축소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장에서 밝힌 바처럼, 노동자계급의 확대와 자본의 거대자본으로의 집중 현상을 분명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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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급 "프레카리아트"는 오늘날 노동계급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오늘날 "프롤레테르""프레카리아트"로 불리고 있다.

 

프레카리아트란 이탈리아어로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오(precario)'와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로 '불안정 노동계급'이란 뜻이다.(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노동계급 '프레카리아트'를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24.04.01.)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일자리는 이른바 '플랫폼노동'이다. 소셜미디어, (App) 또는 웹(Web) 기반의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력이 거래된다.(같은 글)

플랫폼 노동의 가장 큰 특성은 노동은 존재하는데 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사관계도 존재하지 않아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된다. 플랫폼 업체는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고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를 연결하는 '중개자'로 간주돼 사용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한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용역 위탁 계약을 맺고 건당 수수료를 받는 특수고용 또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된다. 이로부터 개수급이 되살아나고, '자기 착취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고, 그래야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저임금, 사회안전망에서도 배제된다. 서비스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플랫폼 노동자들은 그 전(플랫폼노동으로의 전환 이전)보다 임금은 줄어들고 노동시간은 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배송 관련 노동의 경우 평균 주 50시간을 넘는 것은 보통이다.(같은 글)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이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노동자들을 하나의 산업으로 집결시켜 자본의 지배를 끝장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성장하며, 그 힘을 자각하게 된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結社)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 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공산당선언, 백산서당, 남상일 옮김)

 

그런데 현대 자본은 비용을 절감하여 이윤을 늘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회피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외주, 하청, 도급, 자회사 설립, 파견, 용역, 아웃 소싱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실제 원 자본은 하나로 집중되어 거대해지는데도 불구하고 형식상 여러 자본으로 쪼개서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분열, 통제,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보통 자신의 진짜 적인 자본가들과 싸우기 보다는 그 적의 하수인들과 흩어져서 싸우고 있다.

자본은 그 동안 특수고용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분류하여 고용 책임을 회피하여 왔는데, 더욱이 플랫폼노동에는 여기에 남아 있는 착취의 흔적인 "고용"이라는 표현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거대자본은 특수고용노동과 플랫폼 노동은 자영업자라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 나와라", 원청 사용자성 쟁취 투쟁을 통해 이러한 새로운 고용형태의 배후에 거대자본이 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입증하고 있다.

구글, 네이버, 아마존, 우버, 쿠팡, 네이버, 카카오, 배민 등 거대 자본이 바로 그렇다. 제이피모건(JPMorgan) 같은 거대 금융자본은 이들 자본과 결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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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는 단결하지 못하고 혁명은 끝났는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앙드로 고드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분할과 불안정 노동의 증대로 노동자들은 "말단의 군인과 부대장들"처럼, "사단 전체의 움직임이나 작전을 알지 못"하고 "지엽적이고, 부분적이고 전체적 의미를 알 수 없는 명령과 움직임만 알 뿐이"기 때문에 계급적 소속감, 집단주의 의식도 없고, 노동자들이 역사를 인식하고 혁명적으로 되어 사회를 개조해나갈 사명감이나 계급의식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

앙드레 고드의 저작의 부제를 "사회주의를 넘어서"로 잡고 실제 사회주의 혁명을 회피, 부정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는 모든 권력, 심지어 노동자들의 권력조차도 반대하는 무정부주의다. 무정부주의적 인식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할 수 없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구체적 계획이나 현실적 전망도 없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게 만든다.

앞에서 세상이 변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 변화의 실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은 변화하는가? 변화한다. 변화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겉으로 보아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그 이면에서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근본모순이다. 이 세상의 본질적 모순과 질곡은 변화하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격변에 의해 다른 사회로 이행하지 않는 한 모순과 질곡은 그대로 유지된다. 비록 겉모습은 변화한다 할지라도 본질은 더 고도화되거나 세련된 모양을 취하기도 하면서 그대로 유지된다.(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202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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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오늘날 플랫폼 산업이 계속 확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자동차, 항공, 조선, 철강, 반도체, 전자, 석유화학 등 대부분의 핵심 사업은 ()공장 산업이다. 플랫폼 산업 역시 이들 산업과 연관되어 있다.

전통 산업에서는 과거 쌍용자동차 대량해고 사태를 배제할 수 없지만,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연감원 등으로 점차로 줄이고 있는 반면에 외주ㆍ하청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하청화도 1차 하청, 2차 하청, 3차 하청으로 계속 쪼개고 있다.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규모는 300만 명 이상이고 국세청 기준 인적용역 사업 소득자는 850만 명에 이르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에서 일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상시·지속 업무를 하는 공무직이 있는 반면에 1년 미만의 단기직 노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1960, 1970년대는 섬유ㆍ방직 등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투쟁해 왔다면, 1980, 1990년대에는 자동차, 조선 업종 노동자들, 지하철, 철도, 통신 등에서 대공장(대기업) 노동자들과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으로 상징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투쟁을 주도해왔다.

2000년대 초반 한국통신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필두로 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학습지 노동자들의 소수 선도적인 투쟁에 이어 건설, 레미콘, 화물연대, 식당, 청소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숫적으로도 점차 다수가 되면서 투쟁도 주도해나가고 있다. 1960, 70년대의 20대 여성 노동자들, 1980년대, 1990년대의 2, 30대 중공업 남성노동자들에 이어서 이제는 청년, 중장년 여성ㆍ남성 노동자들까지 폭이 확장되고 있다.

이 점에서 세상은 많이 변화했다. 산업도 많이 변화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 아니라 안녕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가 더 확고하게 이 사회의 중심 계급이 되고 있다.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상당수도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이다.

자본주의는 급속도록 변화하고 있지만 착취는 점점 더 고도화 되고 있다. 노동자가 정리해고 되거나 일자를 못구하면 영세 자영업자가 되고 태반이 영세한 자영업자는 폐업하면 (불안정) 노동자로 전락한다.

노동은 존재하는데 자본은 존재하지 않는 플랫폼 노동은 자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아니라 자본이 점점 더 착취를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폐된 착취사회는 착취가 감소, 제어되는 게 아니라 무한착취, 무권리 상태, 노동조건의 악화 등이 노골화 된다. 자본이 다단계 하도급 제도 맨끝으로 올라가서 직접적 착취자의 면모를 은폐할수록 착취는 더욱 노골화 되고 노동자들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노동자들이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성장하며, 그 힘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쪼개면 쪼갤수록 "혁명적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

쪼개진 착취 피라미드 맨 위에 있는 재벌 같은 독점자본가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원청 사용자성 쟁취 투쟁은 재벌사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나의 노조로 결집해 싸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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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례신문


노동운동이 정치화 되어야 한다. "세상이 변했다"면서 노동자들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노동자계급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다원주의ㆍ개인주의 담론들과 맞서 집단주의 혁명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 사회가 변화되었지만 착취현실은 변화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착취자본주의 철폐를 투쟁의 궁극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라진 노동해방 평등세상 건설 요구를 다시 내걸어야 한다. 외주ㆍ하청화, 특수고용노동, 플랫폼 노동은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의 산물인데, 이를 원천적으로 깨부수기 위해서 비정규직 철폐 투쟁으로 정치투쟁을 강화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기간제법, 파견법 등 비정규직 악법을 철폐하는 전면적인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벌에게 깍듯하게 고개 숙여 절하고 "우리는 식구다"’라며 대량실업을 양산하는 AI자본과의 동맹을 강화해 나가는 이재명 정권의 친자본가적 성격을 인식하고 싸워나가야 한다.

분단과 ()식민구조는 노동자들이 해방세상을 만드는데 장벽이다. 분단은 국가보안법으로 하여금 북(조선)을 적대시하고 가난한 독재정권 정도로 그 실상을 왜곡ㆍ은폐함으로써 노동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전망을 포기하고 이 자본주의 착취사회를 감내하도록 하였다. 과학적이고 역사적 사고와 혁명적 계급의식 대신에 정치적 시야를 극단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었다. 미제국주의와의 투쟁 대신 미국숭배 사회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근본모순들과 싸워야 한다.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미제국주의 군대의 철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앙드레 고드는 자본주의의 변화상을 근거로 노동자들이 집단적 계급의식과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명도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하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자본의 분할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유포 등으로 말미암아 계급의식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여성과 남성, 청년과 중장년 등 피지배계급 구성원들끼리 분열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진짜 착취자를 향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자본의 지배가 노동자들을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사회문제에 담을 쌓고 각자도생하게 되지만, 이것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변화상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방식, 생산과 착취방식의 변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빈곤과 불안정 노동, 완전실업의 상태로 내모는 것에 부단하게 저항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자본은 노동자를 분할시키지만 그 분할에도 불구하고 저임금, 고용불안, 장시간 노동, 실업, 무권리 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단결된 계급의식을 가지고 억압과 착취를 뚫고 새사회를 건설하는 개조자, 해방자로 나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