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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 82년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을 청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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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국민주연합 조회114회 작성일 26-08-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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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백철현 편집위원

 

 

194586,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9일에는 나가사키에 팻 맨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곧이어 19458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라디오 방송(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선언(실제로는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과 전쟁 종결을 선언)했다. 이로써 일제의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전역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제 식민지배에 신음 받던 아시아 민족이 해방됐다.

이것이 시간상으로 정리된 태평양전쟁 종결과 관련한 공식 역사이다. 외형적으로 이러한 설명 자체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에 의하면 미국이 일제와의 전쟁을 최후 승리로 이끈 영웅이고 억압받던 민족의 해방자가 된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수십만의 희생자가 나왔지만, 그것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패전하게 되고 일제에 의한 더 많은 피해를 막고 수억의 식민지 치하의 민중이 해방되었다면 그러한 피해는 안타깝지만, “부수적 피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미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였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그러한 명분으로 신화가 되었고 정당화 되었다. 사실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원폭 투하라는 사실은 만천하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그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은 금기시 되거나 은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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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외대 민주동문회 이중원 



여기! 조선인이 있다

 

 

원폭투하로 잊힌 진실에는 조선인들이 있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가장 많은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종결시켰다고 하는 원폭투하로도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하며 고통 받았다. 원폭 투하 81주년을 맞아 지난 84일부터 6일까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 자료집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실려 있다.

 

원폭 투하 이후 81년이 지난 오늘, 조선인 희생자들의 존재는 여전히 세계사 속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단지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전쟁, 핵무기가 교차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배와 전시동원, 일본군 성노예 착취를 비롯해 수만 명의 조선인을 희생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의 원인 제공자입니다. 또한 미국이 전쟁 종결이 아니라 원자폭탄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민간인 거주 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분명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입니다.

작년 히로시마에서 첫발을 뗀 이 추모의 걸음을, 우리는 올해 다시 이어갑니다. 한 해의 행사로 끝나지 않고 해마다 다시 모여 잊힌 조선인들의 이름을 되찾고, 그 고통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이 추모제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히로시마를 넘어 나가사키까지 기억의 지도를 넓히며, 한국과 일본의 종교계·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핵 없는 평화의 세상을 염원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함께 모으고자 합니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노예노동을 하던 조선인들 상당수가 피폭 당했다.

 

이 피해 통계 중 한국인의 인적 피해는 10%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5년 단편적인 추정이지만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한국인 수를 81,862명으로 집계하고 있고, 당시 추정 피해상황은 약 히로시마에서 총 피폭자 7만 명 중 사망자 35,000, 생존자 35,000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총 피폭자 3만 명 중 사망자 15,000, 생존자 15,000명으로 보았다. 즉 한국인은 두 도시에서 약 10만 명이 피폭되어, 그 중 5만 명은 사망, 5만 명은 생존하였다는 수치이다. 이 통계는 또한 생존자 중 43,000명이 고국으로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잔류했다고 제시하였다.

피폭자의 피해는 다양한 신체 질환뿐 아니라 재산 손실, 장애로 인한 노동력 상실, 가정 해체, 방사선에 의한 질병 및 후유증 등 2차적인 증상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실태조사 조차 한·일 양국에서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한일국교정상화 전에는 물론 1965년 한일조약에서도 양국간의 일괄 국교 타결 원칙에 가려져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 뒤 일본 정부는 재한 피폭자 배상에 대해서는 일한조약에서 체결을 끝냈다라는 답변으로 대신하였다.(“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피폭된 피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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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


 

조선인 피해자들은 피폭 당시의 공포와 참상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죽는데 우짤끼라요. 그 다음 뛰어 오는 사람도 있고, 첫째는 물을 찾더라고예. 삶긴 사람들이 머리 있는 사람도 없고. 시내서 오는 사람은 옷 입은 사람도 없고. 남잔가 여잔가 구분도

못해요. 새까마이 숯덩거리데요. 물을 주면 데굴데굴 구불러서 죽어뿌려요. 인자 우리 부친이 바다에 뛰어서 들어가는 바람에 얼굴은 안 삶아서 그렇지 뒤에는 다 삶았어요. 다 삶아도 우째된 판인고. 아이고. 미치겄다. 보상금도 못탔습니다.[1929년생, 이영자,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 2017, 34]

 

막내이가 [원폭] 투하 바람에 집에 찡기가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어예. 7개월밖에 안됐지 뭐. 그래 놓으이 기왓장에 고마 눌리가. 엄마하고 같이. 엄마가 아직(아침) 묵고 젖 먹여 재인다고 있다가. 엄마는 뚫고 나오고. 연기가 휩쓸 리가 깜깜하이 어두운데 찾도 못하고.

난제 없어졌을 때 본께네 아가 하마 숨 떨어졌뿟더래요.( [1930년생, 김순희, 2018.1.1.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인터뷰](이은정 영남대, “피폭된 신체와 고통: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중심으로”)

 

이들 원폭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군도로 불리는 히로시마에 강제동원되어 온 식민지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당한 고통은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한테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폭 피해자들은 피폭의 고통에 더해, -일 청구권 협정으로 마무리된 된 한일 국가의 외면 속에, 피폭자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평생을 고통 받고 살거나 피폭 후유증으로 짧은 생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원폭 투하 당시 피폭된 한국인 10만여 명 중 79가량이 합천 출신으로 알려져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현재 전국 생존 피해자 1482명 가운데 213명이 합천에 거주하며 국내에서 가장 많은 원폭 피해자가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김동민 기자,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서 원폭 희생자 81주기 추모행사 잇따라, 연합뉴스, 2026-08-06)

 

조선의 식민지배와 전시동원, 일본군 성노예 착취를 비롯해 수만 명의 조선인을 희생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의 원인 제공자라는 점에 대해서 여전히 일제는 진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가 식민지배 주범이라는 사실은 대다수가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 종결이 아니라 원자폭탄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민간인 거주 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분명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라는 점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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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대량학살 전쟁범죄 원자폭탄 투하의 진실

 

 

사상의 은사이자 권력에 맞선 참된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히로시카-나가사키 원자탄 폭탄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와 의문에 관해서 가장 권위적인 연구가는 미국의 과학사가 스탠리 골드버그 박사다.

그에 의하면 트루만 대통령의 연속적 원폭투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대일전쟁을 단시일에 종결시킨다는 인도적이유이고, 둘째는 만주에서 대일전쟁에 참여할 소련을 견제하고, 미국의 단독적 승리로 전쟁을 종결시킴으로써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단독적 패권을 확고히 다진다는 외교적 이유이며, 셋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들이 그 계획 추진과 관련된 많은 비난과 반대를 모면하고 중요한 실책들을 면책받기 위하여 폭발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민간도시를 목표로 선택했다는 것이다.(리영희, ‘1945`히로시마`의 영원한 논쟁’, 윌프레드 버체트 저, “히로시마의 그늘추천의 글, 1995)

 

이러한 주장은 리영희 선생뿐만 아니라, 기존 정설로 알려진 역사의 진실을 새롭게 추구하는 수정주의학자들이나 상당수 언론에서 이미 원자폭탄 투하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로 인정되고 있다.

 

새뮤얼 워커라는 역사학자는 미국은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전쟁은 비교적 이른 시일에 끝났을 것이며, 일본 본토 상륙은 필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말한다2차 대전 종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트루먼 등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곧 히로시마의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Atomic Diplomacy)>란 책에서 원폭 투하의 주요 이유는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으며 소련에 겁을 주어 전후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당시의 비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났다.(박인규 편집인,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프레시안, 2017.07.25.)

 

미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대일전쟁을 단시일에 종결시킨다는 인도적이유는 위 글처럼 당시 일본 정부가 이미 항복 의사를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방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처음으로 개발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전에서 사용한다는 세 번째 이유와 함께, 가장 크게는 소련의 군사적 승리를 막기 위해서 미국은 황급하게 일본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제국주의는 소련에 의한 일본의 패배와 일본 진주는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승리라고 간주했다. 미제는 소련의 승리 이전에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패전을 이끌어내고 그 공()으로 자신들이 주도하는 반공주의 전후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이 전후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 프 제국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일본, 독일 추축국에 맞서는 국제적인 반파시즘 투쟁에 참여하여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국제적인 파시즘 대 반파시즘 전선의 전초전이었던 스페인 내전에서는 불간섭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공화정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였다. 독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양자가 파멸할 때까지 싸우기를 열망하며 독일 히틀러와 싸우지 않고 파시즘의 대두와 전쟁을 부추겼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하자 뒤늦게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추축국과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역시 1944622일 소련이 동부전선에 독일군에 맹공(바그라티온 작전)을 가함으로써 서부 전선의 독일군이 동부로 이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시스트 군국주의 세력을 격멸하는 주요 세력은 3000만 명이 희생당하면서 파시즘을 격퇴했던 소련과 일제에 맞서 싸웠던 중국 공산주의 세력들과, 이탈리아 빨치산, 조선의 항일 유격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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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연합군 최종 표적은 히틀러가 아니었다”(박인규 편집인, 프레시안, 2015.04.24.)

 

스탈린과 소련, 국제적인 공산주의 세력들과 민족해방 세력들이 주적이었다. 미제에 의한 원폭 투하는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국제적인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막바지 시점이자 공산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개시되는 시점에 자행되었다. 미국이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힘을 과시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으로 원폭을 투하했다는 주장은 이후 역사적 사실로도 증명되었다. 미국은 19476월 구-미 회의에서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혹은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제시했는데, 이는 2차 대전으로 황폐화된 서구 유럽의 경제를 재건하고 이를 통해 소련을 포위하는 반공산주의 서방진영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고 실제 미국이 1947년 이후 반소 봉쇄 정책을 계속하면서 소련에 대한 핵위협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소련은 미제에 대항하기 위해 핵실험에 박차를 가하고 마침내 19498월에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 핵위협에 맞설 수 있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국의 해방과 국민당의 패배, 그 직후 한국전쟁에서 미대통령 트루먼과 군부 등 미제국주의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검토했다. 특히 1950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패배를 만회하기 평양과 만주에 원자폭탄 사용을 구체적으로 고려하고 맥아더에게 그 사용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소련이 이 전쟁에 참전할 경우 소련에 대해서도 핵공격을 가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의도는 소련의 핵무장과 보복 가능성, 중국과의 전면전 비화 가능성, 서유럽 국가들과의 이견 등으로 인해 좌절됐다.

미국은 1958년 이남에 전술 핵무기를 도입하고 일본 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핵잠수함과 핵폭격기 등으로 한국과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1959년 주한미군 오산 비행장에서 핵을 실은 전투기 연료 탱크에서 불이 나 폭발하는 사고와 오키나와 나하 비행장에서 핵미사일이 미군의 조작 실수로 발사되어 위험천만한 핵사고 참화가 벌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수십 만 무고한 인류를 학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실험을 하고 핵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하고 핵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침략전쟁과 제재를 가하는 등 전 세계에서 모든 핵위협의 원흉은 언제나 미제국주의였다.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핵으로 자행한 인류 대학살 범죄는 미국의 반소 반공전의 일환으로 자행되었고, 그 이후의 핵전쟁위기와 핵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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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

 

미제국주의에 의한 원폭 투하는 정의의 전쟁 수행이 아니라 집단학살이자 잔학한 전쟁범죄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을 핵에 의한 집단 학살(nuclear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리차드 미니어는 히로시마를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전쟁범죄, 즉 핵 홀로코스트(atomic holocaust)라고 말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로부터 절멸주의(exterminism)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으며 도시와 국가, 그리고 세계까지도 파괴하는 것, 즉 핵무기에 의한 전면적 파멸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학자들만의 의견인 것도 아니다. 도쿄 전범 재판(1946~1948)에 참여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소수 의견을 통해 미국의 원폭 공격은 “(태평양전쟁에서 일어난 사건 중) 나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적했다.((박인규 편집인,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프레시안, 2017.07.25.)

 

그럼에도 미제에 의한 이 인류 대학살은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으로 철저하게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

 

셔윈은 히로시마 이후 수 십 년에 걸친 역사학자들의 연구 끝에 히로시마의 진실이 거의 밝혀졌으나 이러한 역사 연구의 결과들이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에서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정치적 통제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밝혀냈으나 그 진실이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라고 말한다.(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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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부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은 직접적으로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의 진실이 알려지지 않게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고 인류를 대학살한 히로시마의 진실을 덮었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에는 북핵반대라는 명목으로 북에 대한 적대시 정책, 제국주의자들의 핵독점 정책, 핵패권 정책을 은폐함으로써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을 상속하고 있다. 또한 2천만 아시아 인민과 3백십만 일본 인민의 피와 반전평화의 염원이 서려 있는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본을 다시 침략 전쟁국가로 변모시킴으로써 그 유산을 확대재생산 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부추기며 미일동맹, 미일한 동맹을 구축하여 신냉전을 조장하는 것도 미국이다.

반북, 반중, 반러 가치동맹을 기치로 미일한 전쟁동맹의 유지, 강화를 위해 일제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전쟁범죄, 미제가 자행한 핵홀로코스트는 금기가 되어 면죄부를 받고 있다.

미국은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명목으로 주한미군의 활동 범위를 중국 억제에 두며 동북아 전역과 태평양지역으로까지 넓히고 있다. 한국이 불침 항공모함이니 아시아의 단검이니 하는 미국 인사들의 망발은 여기서 나왔다. 미국은 다영역합동군사연습인 '프리덤 에지', '을지프리덤쉴드'를 비롯해 미일한 3자 군사협력을 보다 강화해 나가고 있다.

미국은 미일한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독도영토분쟁이나 역사왜곡 문제 등으로 한국과 일본이 대립하는 걸 원치 않는다. 대신 한국이 일본과 군사적ㆍ정치적으로 협력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따라 한국과 일본은 조선의 핵·미사일 관련 정보 등을 함께 보고 보호하는 명목으로 2016년부터 군사정보를 주고받는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맺고 있다.

이러한 한일협력의 기조 하에서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7차례나 일본 정부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한반도 근해에서 한··일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 훈련이 실시되고, ·일 수색구조훈련이 제주 동남방 해상에서 9년 만에 재개됐다. 11년 만에 서울에서 한·일 국방장관 회담도 열렸다. 한국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자위대 활동 영역 확대에 발판을 제공하고 한반도와 대만해협을 한 묶음으로 만들려는 미·일의 구상에 동참하겠다는 신호로 읽히는 흐름이다. ·유럽연합(EU)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 문제를 거론한 걸 보면 이런 의문이 커진다.(서의동 논설실장, “·일관계에 대한 불편한 시선”, 경향신문, 2026.08.10.)

 

지금 펼쳐지고 있는 한·일협력관계를 아무리 불편한 시선으로 본다해도,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인 미제국주의의 반북, 반중 ()냉전 정책, 한반도 정책을 빼고 한ㆍ일 관계를 따로 분리해볼 수는 없다.

 

한국과 일본의 안보협력의 강화는 미국이 지속적으로 바라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축으로 동북아 지역에서의 군사적 균형은 물론이고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세계적 군사전략을 구현하려 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북한 핵 위협 등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연계가 강화돼야 하는 상황이다.("되돌아본 '한미일 집단안보체제' 구축 시도핵심 변수는", 연합뉴스, 202384)

 

굴욕적인 박정희 한일협정 배후에 미국이 있었고, 위안부 합의, 졸속 타결 배후에도 미국이 있었던 것처럼, 호전적인 한일협력의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다. 미제의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서의 민중 대량학살에 이어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추구라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 타도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